「중외일보」의 기고와, 「동북에서 새롭게 일어나고 있는 것」
「중외일보」라는 신문이 있습니다. 각 종교의 활동을 전하는 신문입니다. 이번에, 가와카미(川上) 나오야(直哉) 저의 논설이 게재되었으므로, 여기에 소개하겠습니다.
내용은, 재난시에 있어서 각 종교자의 협동의 가능성과 과제에 대해서입니다. 아래에 그 전문을 게재 하였으므로, 보아 주시면 감사 하겠습니다.
우리들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지원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으로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지원 한다고 하는 것도 포함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럼, 우리들이 그리스도교를 애매하게 하는 것인가,라고 한다면, 절대 그러한 일은 없습니다. 오히려 반대입니다. 우리들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존엄을 걸고, 타 종교쪽과 함께 일하며. 다른 종교자 분들 안에서, 그리스도를 증명해 간다. 이것이, 진정한 의미에서의 「복음을 전하는 것=전도」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다른 종교자와 함께 하는 지원은, 사실은, 「고귀함」을 겨루는 진지한 승부의 장소 입니다.
그러한 일들을 생각하면서, 기고를 하였습니다. 그러자, 신문사에서, 앙케이트의 부탁을 받았습니다. 그 응답도, 오른쪽에 소개 하겠습니다. 그것은, 헌법에 관련된 앙케이트였습니다. 이 앙케이트에 응하면서, 저는, 작년 9월29일, 센다이 (仙台)에서, 다른 종교자와 함께, 헌법으로부터 원전을 생각하는 심포지엄을 개최한 일을, 상기했습니다. 그 때, 우리들은 하나의 「어필」을 채택했습니다. 그것은, 이번 달 말에 시작되는 세계교회협의회 부산대회에 연결되는, 확실한 이정표였습니다. 그것도, 오른쪽에 소개 하겠습니다.
피해입은 동북에, 뭔가 새로운 것이 일어나고 있는것 같이 생각됩니다. 하나 하나, 읽어 보아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2013년10월11일 사무국장 가와카미(川上) 나오야(直哉)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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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자의 피해자 책임 : 피해지역 / 피폭지의 현장에서 일본 기독교단 센다이 시민교회 목사 가와카미(川上) 나오야(直哉)
「피해자 책임」이라고 하는 말이 있다. 피해자는, 많은 지원을 받고, 그 은헤에 보답 하고 싶어 한다. 그러한 뜻을, 「피해자 책임」이라고 부른다.
2011년3월11일, 저는 센다이시(仙台市) 와카바야시구(若林区)에 살고 있었다. 면적의 반이 쯔나미로 쓸려간 지역이다. 자동차로 익숙했던 많은 장소가, 파편 더미로 덮어져 있었다.
일주일뒤, 저는 그리스도교의 지원 조직 「센다이(仙台) 그리스도교연합 피해 지원 네트워크(동북 헬프)」의 사무국장이 되었다. 많은 나라에서 물자와 자원봉사가 모여들었다. 그것은 매일 기적을 보는 것같았다. 인간의 선의가 전개하는 크기에, 그저 놀랐다. 지금 여기에 기회가 주어져, 나도 「피해자책임」을 다하고 싶다. 여기서 제가 하고 싶은 것은, 종교자의 한사람으로, 현장을 확인하고, 지금까지 무엇을 할 수 있었는지를 정리하고, 현장에서 마주 향하는 길을 내보이는 것이다.
먼저 피해지역의 현상에 대해서 간결하게 말한다.
쓰나미가 덥치고 빠졌다. 그 결과 피해입은 재해는, 지금, 점차로 진정되어 가고 있다. 잔혹할 정도로 확실하게, 일상으로 돌아 오고 있다. 사람들의 영혼의 깊은 곳에 상처가 남았다. 그 상처는, 생활 중심의 깊은 곳에서, 그치지 않는다. 그 아픔 속에서의 일상이 시작된다. 기억은 풍화되어 간다. 힘이 있는 사람들은 자립해 간다. 그렇게 해서, 적지 않은 사람들이 고립해 간다.
다른쪽은, 쯔나미 피해가 끝나 일상으로 돌아옴과 동시에, 피폭이라고 하는 현실이 점차적으로 모습을 나타내기 시작하고 있다. 지진 재해로 기인하는 특별죽음(지진 재해 관련 죽음)자수는, 후쿠시마(福島)가, 엄청나게 늘어나고 있다. 그리고 오염 물이 새어나가고 있었던 것이 발각되어. 불안이, 조용하게 사람들을 괴롭힌다. 이것은 후쿠시마에게만 머무르지 않는다. 한국에서는 「후쿠시마의 괴담」이라는 제목이 붙인 사이트가, 여러가지 기형 식물의 사진을 대량으로 모아, 무수한 사람들의 눈길을 끌고 있었다. 또 한국에서는, 생선이 평상시보다 10퍼센트 밖에 팔리지 않게 되었다고, 친구가 말했다.
쯔나미 피해 속에서, 우리 종교자들이, 할수있는 일이 있었다. 그것을 지금, 총동원 하지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한다. 그 뜻을, 하기같이, 지진 재해로 일어난 사건을 간결하게 정리해 보고자한다.
우리 동북 헬프는 지금, 「동경 대학(東京大學) 피해지역 지원 네트워크」 및 「미야기현(宮城県) 임상심리사회」와 협력하고, 1995년의 한신(阪神) 아와지(淡路) 대지진 재해 이래, 재해 대응의 발걸음을 검증하는 회의를, 매월 개최하고 있다. 확실히, 동일본 대지진은, 그 발화 당초부터, 한신(阪神) 아와지(淡路) 대지진 재해와의 관계 속에서 생각할 수 있었다. 그것은, 종교자도 같았다.
지진 재해 직후, 한신(阪神) 아와지(淡路) 대지진때에 실패한 경험이, 종교자간에서 확인되고 공유되었다. 대재해 속에서 많은 사망자가 생겼다. 그 많은 수로 인하여, 애도하지도 못한채 태워지는 사망자. 그 참혹함에 대응하기 위해, 종교자는 일어섰다. 이것은, 1995년이나 2011년이나, 같았다. 그러나 1995년에는, 종교자와 행정이 엄격하게 대립 하였다. 그 현장을 아는 사람들이, 2011년 3월말, 사단 법인 센다이(仙台) 불교회를 주도하고, 장례의 자원봉사를 시작했다. 곧 합류한 우리들 그리스도인에게, 승려는 한신(阪神)의 경험을 함께 이야기 했다. 우리들은 그 실패에서 배우는 것부터, 협동을 시작했다.
협동 안에서, 역활 분담이 생겨났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전국•전세계의 네트워크에 직결하고 있다. 그 커넥션을 이용하고, 우리 그리스도인은, 예를 들면 행정부의 책임자와 직접 상의할 수 있었다. 한편 불교자는, 지역 신도들의 네트워크를 정교하고 치밀하게 파악하고 있다. 시시각각 바뀌는 현지의 구체적 상황은, 이 네트워크에 의해 시시각각 알게 했다. 지역에의 밀착과 전국•전세계에의 직결이, 여기에 결부되었다. 거기에, 큰 가능성이 나타났다. 그 결실이, 「신원불명자의 장례」다.
우리들 종교자는, 의료자•카운셀러•social worker와 함께, 행정부의 허가를 얻어, 화장터에서 장례의 상담을 접수하는 「마음의 상담실」을 설치했다. 여기서 요청을 받아, 장례를 치르고, 화장하는것까지 함께한다. 그것이 우리들의 역할이 되었다. 그리고 어떤때는, 신원 불명자의 사체가 보내져 온다. 함께 오는 사람은, 경찰 관계자와 화장터 직원뿐. 이외에 아무도 없는 조용한 시간, 한번에 3구정도의 시체를 태운다. 그 현장에 우리들도 대기했다. 화로가 닫히고, 화장이 시작된다. 그러면, 그 화로 앞에서 장례가 시작된다. 저쪽에서 명창이, 이쪽에서 축사가, 저쪽에서 찬미가가, 울린다. 아무도 없는 화장터는, 각 종교의 교향(交響)의 장소가 된다. 그 광경을, 저는 잊을 수 없다.
도대체 거기에서 우리들은 무엇을 한 것인가? 우리들은, 애도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들은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목숨을 살리는 것도, 카운셀링도, 생활 재건의 상담도, 할 수 없었다. 한 것은, 의식을 행하고 기도한 것 뿐이다. 그러나, 의식과 기도를 할 수 있었다. 협력하는 것으로, 그것들은 가능해졌다. 그것은, 큰 것이었다.
죽음은, 거기에 있다. 사람은 죽는다. 멈추게 하는 것은, 할수 없다. 게다가, 죽음은 갑자기 찾아온다. 치료의 모든 수단을 다 쓴 병자의 경우라도, 쯔나미에 덥쳐진 사람의 경우라도, 역시, 죽음은 갑자기 찾아온다. 우리들은 그것을 준비하고 기다리는 것조차, 할 수 없다. 우리들의 한계가, 죽음의 현실 앞에, 노정(露呈)한다. 그 때, 산다는 것의 의미가, 심각하게 다시 질문된다. 절망이, 조용히 살며시 다가온다.
그러나, 우리들은 거기에서 기도할 수 있다. 현실을 넘은 무언가에 호소하며,혹은 그 호소에 응하는 목소리를 듣는 것 같은 기분이 될 수 있다. 그것은, 우습게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렇게 하면서, 우리들은 절망에 저항한다. 게다가 그 저항을 더욱더 유지하기 위해, 의식을 행하고, 경문을 외치고, 노래 부른다. 그렇게 해서 우리들은 초월을 상기한다. 기도와 의식은, 초월에 연결되는 희미한 가는 길이 된다.
기도와 의식에 있어서, 우리들은,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인가? 우리들은 그 때, 절망에 절박한 사람들의 측에 있다. 그 것이, 결정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절망은, 감염한다. 그러므로 통상, 사람은 절망에 절박한 사람들 측에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절망하는 사람은 고립한다. 이렇게 해서 절망은 그 사람 안에 고정 해 버린다. 사는 힘은, 그렇게 해서 빼앗긴다. 누군가가, 절망에 절박한 사람의 측에 있으면 좋은데. 하지만, 어떻게? -- 여기에, 우리들 종교자의 역할이 있다.
한계를 느끼며, 그러나, 그래도 여기에 있다. 그것은, 이상한 것이다. 누군가가 나를 여기에 존재하게 하고 있다. 한계를 느끼게 하는 한복판에서, 우리들은 「그래도 존재 하고 있다」라는 현실을 느끼게 한다. 초월이라 부를 수 있는 것은, 그렇게 해서 확인된다. 단, 고립해서는 알수가 없다. 누군가가, 무력한 모습으로 함께 있어 주면, 그 사람의 존재를 단서로, 초월의 존재에, 알아차릴 수가 있다. 「이 사람도 있어서 좋기 때문에, 자신도 있어도 좋다」라고, 사람은 거기에, 절망에의 저항의 단서를 찾아낸다.
종교자는, 절망의 절벽에 서 있는 사람 측에 있을 수 있다. 기도와 의식은, 그것을 위한 기술이다. 기도와 의식을 행하는 것으로, 무력한 그대로, 한계를 드러내고, 종교자는 절망에 절박한 사람과 계속 함께 있다.
절망에 즈음에서, 초월을 내보이는 것. 그것이, 종교자가 할 수 있는 장례였다. 그 장례를 행하기 위해서, 종교자의 협력은 불가결했다. 이 협력에 의해, 종교자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행하였다.
이상은 지금, 피폭이라는 새로운 현실 중에서, 다시 한번 확인해며 진행하고 싶다. 거대한 피해가, 눈으로 보이지 않는 모습으로, 터무니없는 시간을 걸쳐서, 다가오는 불안에 사로잡힌다 (일부 지식인이 말하는, 그 불안이 기우라는 것을 소망하면서!) . 그 불안을 앞에, 무력한 자신이 있다-- 그것이 후쿠시마(福島)의 현상이다. 여기에 절망은 쉽게 다가온다. 거기에, 종교자의 역할이 있다. 사람들과 함께 버티고 서서, 절망에 저항한다. 신음하면서 기도하고, 조용히 의식을 행한다. 그렇게 할 수 있는 일을, 신불에게 감사하면서, 행한다. 그 무력의 상태에, 초월에의 통로가 개척되는 것을 환상하면서.
피해지역에서 체감한 일들을, 그 다음에 연결시키는 것. 그것이 피해자 책임이다. 그 책임을 묻는 날은, 벌써 도래하고 있다. 각종교가 협력하고, 절망에 저항해 초월의 통로를 열기 위해 기도 의식을 행하는 것. 그것이, 지금 요구 되어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필자 프로필 : 가와카미(川上) 나오야(直哉) . 1973년, 홋카이도 출생. 신학박사 (조직신학). 현재, 일본 기독교단 센다이시민교회 주임담임 목사, 센다이 그리스도교 연합 피해 지원 네트워크 (동북 헬프) 사무국장, 동북 학원 대학 (東北學院大學)• 센다이 시라유리여자대학(白百合女子大學) 비상근강사, 동북 대학 (東北大學) 「실천 종교학」기부 강좌 운영 위원장, 식품방사능계측소 「기도」 운영 위원장, 세계식료 데이 센다이 대회 실행 위원장.